지난날 대청봉에서 다짐했던 서북 능선. 비 예보는 있지만 안 가면 후회할 것 같았다. 기회는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살면서 후회가 왜 없을까마는 그때가 최선이었다고 변명 또한 많았다. 남설악과 내설악의 경계인 14Km 13시간의 서북 능선. 문득 이념의 좌우가 생각났다. 서북 능선은 어느 쪽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길이었다. 左右는 허울뿐이고 기득권의 위선만 설치는 세상은 구름에 가려 보지 못했다. 어쩌면 다행이었다. 대신에 교과서에서 배웠던 높새바람의 푄현상만 보고 왔다.
함백산 꼭대기의 바람은 흔들림보다는 소리로 존재를 나타낸다. 그 소리는 이별의 슬픈 노래를 닮았다. 떠나는 사랑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랑. 대체 어떤 사랑이었기에 雪山의 산맥 너머로 울부짖으며 떠날까? 마음 섞은 사랑은 한 번쯤 돌아봄도 한데 情 떨구는 일처럼 매섭게 몰아치는 걸 보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이별을 하려면 ‘함백의 바람’처럼 해야겠다. 사랑은 부질없는 일. 잊는 것도 사랑이라며 다 버리고 돌아서는, 그래서 이룰 수 없는 '슬픈 사랑'을 닮은 함백의 바람처럼.
아득히 높은 곳, 천왕봉에서 언제 다시 세상을 내려볼 수 있을까? 땅 위의 높고 낮음이 부질없음을 언제 또 깨닫게 될까? 장터목에서 우주 먼 길 달려온 별을 봤다. 초롱초롱했다. 하지만 중산리 지상의 별은 흐느적거렸다. 사람 사는 곳은 욕심과 근심이 많은 탓이다. 이제는 약속도 함부로 하지 못할 나이가 됐다. 아마도 마지막 지리산 산행일 것이다. 하기야 마지막이 어디 지리산뿐이랴. ‘마지막’이라는 말은 괜히 눈물 나는 일, 배웅하고 내려오는 길에 비가 내렸다.
[어느 해 결혼 기념일에 쓴 일기입니다...] 영일대 어느 찻집에서 차 한 잔 마시며그동안 고생했다고 지금까지 미안했다고그리고 항상 고마웠다는 내용의 몇 자 적은 나의 편지와 함께빨간 장미 한 송이를 건네줄 때아내가 두 눈에서 수줍음을 보였던 것을 보면어느 시인의 말처럼 나의 아내도 이제까지열아홉 나이를 숨기고 살아왔는지 모른다근사한 호텔에서 오색 불꽃 터트리며와인잔 부딪히는 결혼 기념일이내 아내라고 해서 왜 좋아하지 않겠나마는영일만 밤배의 아련한 불빛과쇠 만드는 공장의 야경으로 오색 불꽃을 대신하며 파도 소리 발 맞춰 바닷가를 걸으면서도과년한 딸 귀가 걱정에집 떠나있는 아들 안부 걱정에홀 시아버님의 잠자리 걱정에아내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집으로 향했던그날의 결혼 기념일...지금 생각하니나의 아내는 열..
